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칼뱅 (문단 편집) ===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대립 ===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대립에 앞서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의 사상과 비교할 때 독자적이고 대등한 신학은 아니며 칼뱅주의 신학에서 예정설, 은혜론에 과격한 부분을 수정한 사상이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애당초 칼뱅 사상 자체를 대적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Sovereignty)에 달렸는가, 인간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달렸는가? 양쪽 모두 성경에서 근거구절을 들고 있으며, 양쪽 모두 일정 부분 합당한 면이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인정할 경우 교리상 치명적 결함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기독교]] 내 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밑에 후술하는 것과 같이 자유의지 이론도 은총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헷갈리지 않게 정의하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와 다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만으로 구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인간이 자신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쓴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문제, 자유의지 이론과 은총론을 동시적으로 연구한 신학자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동로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율법과 같이 도그마, 권위를 부여하여 부패한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바울의 이신칭의를 강조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정치적으로 가톨릭에 반대하기 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칼뱅주의의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주권'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 세상에 [[악의 문제|도대체 왜 악이 존재하며]] 사후에는 무슨 명목으로 [[지옥]]에 보내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 여기에는 보통 그릇이 토기장이를 탓할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이 이어지곤 한다. 어쨌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알아서 완벽하게 공의롭게 판단할 것이니 [[인간|우리]]가 뭐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으로부터 하나님께 면책을 주기 위해 자유의지를 인정하자니, 개신교 신학에서 인간의 위상이 지나치게 상승하여[* 칼뱅주의에서는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구원을 수용하며 동참한다.'고 본다.] 거꾸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손상되는 것.[* 토마스 아퀴나스가 밑에서 후술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인간의 성화에 균형을 잘 잡은 편이었다. 사실 이 신학의 문제는 서방 기독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서방 기독교는 인간의 죄 → 하나님의 구속→ 인간의 성화에서 끝나지만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죄 → 하나님의 구속 → 인간의 성화 → 인간의 신화(theosis, theopoiesis)까지 나아간다. 즉 정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며 인간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인간 스스로 노력하도록 놔두지 않고 끝까지 견인해가시며 끝에는 인간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신학적인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물론 칼뱅이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 강요』에서 나름대로의 설명을 펼치고 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자유선택과 노예의지''' 교리.[* 자유의지로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 쪽으로만 선택하게 되어, 인간의 의지는 구원에 일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교리.]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체는 과거 펠라기우스주의와도 닮은 점이 있으나, 인간의 선행에 대해 상당한 시각차를 보임으로써 그들과는 거리를 두둔다. [[존 웨슬리]]에 의해 창시된 [[감리회]]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후사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고 학부용 조직신학 교과서에도 이러한 시각으로 기술된 경우가 잦으니 매우 주의해야 한다.[* 감리회와 대립하는 장로회 학자 중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교과서.] 이는 [[감리회]]의 선행은총 이론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님의 은총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협력해서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신인협력설을 오해한 결과이다. 감리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선행이 틀림없지만 엄연히 이들도 배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즉 이들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고수하였던 전적 타락론에 반기를 든 것일 뿐 어설프게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리회의 교리화 과정에서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진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네덜란드에 '항변파 교회(Remonstrantse Kerk)'라는 이름으로 있으나 감리회와 달리 미미한 존재이며, 그나마 세계적으로 선교도 안 되어서 교세가 위축되어가는 형편이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자연인은 자연을 보고 관찰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제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초자연적인 확실한 증거, 곧 믿음으로 알 수 있다. > - [[존 웨슬리#s-4|존 웨슬리의 어록]] 中 - 현재 이야기되는 논의들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감리회 신학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은총에 기반한 [[유비]](analogy)에 기초한다.[* 유비이론을 정말 간단히 정의하자면 "인류는 자기기만으로 인한 죄에 의해 하나님과 극렬하게 대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총, 곧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드라마를 통해서 드러난 그의 영광의 형태(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믿음으로 만물 안에 내재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의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정통 기독교 사상에 속한 것이다.][* 사실 [[가톨릭]]의 교리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도 펠라기우스의 설명보단 감리회의 설명과 훨씬 비슷하다. 다만 개신교 측에서는 그 자유의지 하나를 설명하려고 교회의 역할과 성사, 선행 등을 개신교에 비해 많이 강조하는 [[가톨릭]]의 교리를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유비이론 자체는 초대교회 교부시대 때 여럿 교부들이 언급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의 연구 중에 교회에 수용되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만유구원론이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 즉 감리회도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교파로서 이신칭의를 강조한다. 의외로 다른 기독교 교파 교리의 측면에서에서 시간의 의미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시간 역시 피조된 것으로, 신 앞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가톨릭과 칼케돈파 정교회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삶의 끝을 신이 모를 수는 없다. [[로마서|성경]]에서 동일한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는 구원문제와 칭의 사건을 종종 법정에서의 재판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구원은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생명을 판결하는 심판 법정과 같으며 하나님은 법정의 재판장이며 인간은 피고인석에 앉은 죄인으로 묘사한다. 웨슬리안과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각각 이 묘사에 대입하여 차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웨슬리안과 칼빈주의 모두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자 핵심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둘의 구원론에서 예수의 역할은 다르다. 웨슬리안의 구원론에서는 사탄이 검사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의 죄악을 재판장에게 고발한다. 그러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주인으로 영접한 신자는 예수가 이 피고인에 대한 변호를 해서 인간은 변호인의 방어에 의하여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사탄의 논고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불신자는 사형을 피할 수 없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에서 검사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의 기준에 미달한 인간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간의 죄악을 재판장에게 고발한다. 이 재판에서 변호인은 없다. 자기변호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형이 선고되고 재판장은 이를 확정한다. 그런데 이 형벌의 집행장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주인으로 영접한 신자의 경우에는 예수가 흑기사로 나선다. 그리고 재판장이 집행을 선언하면 죄인에 대한 처형이 집행되고 예수가 자신의 생명으로써 사형수의 죄값을 대신 치른다. 그러면 그 형벌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피고인의 죄악은 더이상 피고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